촛대는 무엇입니까?

마지막 업데이트: 2022년 2월 12일 | 0개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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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뽑은 기별 1

나는 계시록 2장 4절과 5절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오트세고에 있는 신자들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 2:4, 5). 이런 권고의 말씀을 들은 백성들에게는 충성된 증인께서 인정하신 바 여러 가지 탁월한 자질들이 있었다. 충성된 증인께서는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고 말씀하셨다. 바로 이 점이 저들이 보충해야만 할 결점이었다. 다른 모든 은사를 가지고도 이 부족을 메꿀 수는 없는 것이었다. 또 그 교회에서 권고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계 2:5-7) 고 말씀하셨다. 1SM 369.1

여기에 하신 이 말씀은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을 갖고 계신 충성된 증인께서 하시는 경고, 견책, 위협 및 허락의 말씀이 된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계 1:20). 1SM 370.1

성소의 저울로 이 교회를 달아보았을 촛대는 무엇입니까? 때에 저희 첫사랑을 버렸으므로 부족함이 드러났다. 충성된 증인께서는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계 2:2, 3) 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모든 것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그 결함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면 그 치명적인 결함이란 무엇이었는가? — ”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우리들이 바로 이러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들의 교리가 정확한 것일는지 모른다. 또한 우리들이 거짓된 교리를 증오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원칙에 진실하지 않은 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끈질긴 노력으로 열심히 수고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것들로 모든 것이 충분한 것은 아니다. 과연 우리들의 동기는 무엇인가? 우리들이 회개하라고 부르심을 입은 목적이 무엇인가? —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1SM 370.2

교회의 모든 신자들은 이 중대한 경고와 견책에 대하여 연구하여야 한다. 각자는 진리를 위하여 논쟁하며 교리에 대하여 토론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에 대한 부드러운 사랑을 상실하지 않았는지 살필 것이다. 혹시 설교 가운데서 또는 우리 심령에서 그리스도를 제외해 버린 적은 없었는가? 비록 많은 사람들이 진리에 대하여 공언하면서 전진하고 선교 사업에 종사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저들의 수고 가운데 전혀 섞여 있지 않은 그러한 위험은 없었는가? 충성된 촛대는 무엇입니까? 증인께서 주신 엄숙한 경고 가운데는 의미 심장한 뜻이 있다. 이 경고의 말씀은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요구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을 때에 충성된 증인께서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 2:5) 고 말씀하셨다. 아, 교회가 처음 사랑의 열성에 대한 필요를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사랑이 결핍될 때에 다른 모든 은사들이 있을지라도 불충분한 것이 된다. 회개하라는 부르심은 위험을 감수함 없이는 무시해 버릴 수 없다. 진리에 대한 이론을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이러한 이론을 불신자들에게 증거하는 것이 그대들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증인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들이 기별을 처음으로 받아들였을 때에 그대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던 그 빛이 그대들의 신앙적인 경험과 수고의 본질적인 요소가 되어야 하는데 바로 이것이 그대들의 심령과 생애 가운데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대들의 열성의 결핍을 주시하시며 그대들이 타락하여 위험한 위치에 놓여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다. 1SM 370.3

사랑과 촛대는 무엇입니까? 율법을 함께 증거하라

많은 사람들은 율법이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을 묘사하는 일에 실패한다. 그처럼 위대한 진리를 가졌고 중대한 개혁 문제들을 백성들에게 증거해야 할 자들이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의 표현인 대속 제물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였다.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받은 자들의 신앙적 체험 가운데서 예수님을 위한 사랑이 결여되어 있으며 인류의 구원자를 높이는 대신에 자신만을 높여 왔다. 율법을 범한 자들에게 율법을 증거할 때에 그 율법이 마치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상과 품성에 대한 해석자로서 증거할 것이다. 태양 광선이 태양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율법 역시 거룩한 법의 제정자를 제쳐 놓고는 바르게 증거 될 수 없다. 기별을 전하는 자는 “율법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있다. 그대들 자신이 와서 바울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 고 선포한 율법이 과연 그러한지 살펴보라” 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율법은 죄를 견책하며 죄인을 정죄하고 자비와 선하심과 진리가 충만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필요를 깨닫게 한다. 비록 율법은 죄의 형벌을 감해 주지 못하고 죄인에게 그의 모든 부채를 청구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고 당신의 자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회개하고 믿는 영혼에게 풍성하게 미친다. 영혼에게 찍힌 죄의 낙인은 오직 대속 제물의 피를 통해서만 지워 버릴 수 있다. 하늘 아버지와 동등하셨던 주님의 희생보다 촛대는 무엇입니까? 덜한 제물로서는 그 요구에 응할 수 없었다. 주님의 생애, 겸비, 죽으심 및 멸망받은 인류를 위한 중재 등을 포함한 그리스도의 사업은 율법을 높이고 존귀케 하는 것이었다. 1SM 371.1

율법의 주장에 관한 많은 설교들이 그리스도를 제외한 것이었으며 이 결함은 진리가 영혼들을 회개시키는 데 무능한 것이 되게 하였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이는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일에 단 한 발자욱도 전진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죄인이 자기의 구원자이시며 영원한 친구가 되시는 주님의 사랑과 권능에 대하여 얼마나 자주 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그리스도의 대사 (大使) 가 율법의 주장에 관하여 밝히 증거할 때에 아무도 그리스도의 대속하시는 희생이 없이 의롭다 하심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을 밝히 깨우쳐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없다면 거기에는 다만 정죄가 있을 뿐이며 격한 분노의 두려운 광경과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영원히 분리되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기 위하여 그 마음의 눈이 열린 자는 사랑과 동정이 충만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폭군과 같은 존재로 혹은 냉혹하신 분으로 나타나지 않으실 것이며 오히려 회개하고 돌아온 아들을 품에 안기 위하여 간절히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나타나실 것이다. 그 죄인은 시편 기자와 함께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 (시 103:13) 실 것이라고 부르짖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참된 품성 가운데 나타나실 때에 모든 절망이 그의 영혼에서 사라질 것이다. 1SM 371.2

참된 셋째 천사의 기별

어떤 형제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한 문제를 가지고 우리들이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적이 염려하고 있으나 나는 아무도 이 일로 인해서 놀랄 필요가 없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이 교리를 성경에 밝혀진 그대로 증거함에 있어서 아무런 위험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과거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철저히 가르치는 일에 태만과 부주의함이 없었다면 오늘날에 와서 특별한 관심을 집중시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모든 의의 원수인 마귀가 꼭 그렇게 되도록 계획한 것처럼 성경 가운데 우리들에게 주신 바 굉장히 위대하고 고귀한 허락들을 대부분 잊어버리고 말았다. 마귀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참된 성품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도록 우리들과 우리 하나님 사이에 자기의 어두운 그림자를 늘어뜨린다. 여호와께서는 당신 자신이 친히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 (출 34:6) 이라고 선포하셨다. 1SM 372.1

여러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기별이 셋째 천사의 기별이냐고 편지로 나에게 물어 왔으며 나는 “그것은 참된 셋째 천사의 기별이다” 라고 했다. — 리뷰 앤드 헤랄드, 1890년 4월 1일. 1SM 372.2

촛대는 암호화폐를 위해 작동합니까?

암호화 촛대를 언제 사야합니까? 망치 촛대 패턴의 이상적인 가격 위치는 하락세의 끝에. 망치 촛대를 기준으로 거래를 시작하려면 거래에 들어가기 전에 양초가 닫힐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가격이 위로 돌파되면 양초가 고점에 도달하면 진입할 때입니다.

비트코인 캔들이란? 촛대는 주어진 기간 동안 시장에서 가격 행동을 설명하는 데 사용. 일반적으로 거래소에서 금융 상품의 시가, 고가, 저가 및 종가로 구성됩니다.

Coinbase에 촛대 차트가 있습니까?

Coinbase는 가격 캔들 차트 및 라인 차트와 같은 몇 가지 다른 차트를 제공합니다., 주문서에 대한 깊이 차트뿐만 아니라. 아래 그림은 가격 캔들과 라인 차트입니다.

촛대 추세를 어떻게 읽습니까? 검정색 또는 채워진 촛대는 해당 기간의 종가가 시가보다 낮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약세이며 매도 압력을 나타냅니다. 한편, 흰색 또는 속이 빈 촛대는 종가가 시가보다 높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낙관적이며 구매 압력을 보여줍니다.

코인베이스 프로는 무료인가요?

Coinbase Pro는 가입 비용을 청구하지 않습니다.. 자금 보유에 대한 수수료도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원하는 기간 동안 계정에 자금을 보관할 수 있습니다.

암호화 차트는 어떻게 배우나요? 지지와 저항을 이해하는 것은 암호화 차트를 읽는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입니다. 차트의 지원 수준은 자산이 일정 기간 동안 촛대는 무엇입니까?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가격 수준을 나타냅니다. 반대로 저항 수준은 자산이 더 이상 상승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가격을 나타냅니다.

데이 트레이딩 크립토는 어떻게 돈을 버나요?

Crypto Day 거래 전략

  1. 1단계: 변동성이 높고 유동성이 높은 코인을 픽업합니다. …
  2. 2단계: 5분 차트에 자금 흐름 지수 지표를 적용합니다. …
  3. 3단계: 자금 흐름 지수가 100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
  4. 4단계: MFI = 100이고 후속 캔들이 강세일 경우 매수합니다.

하락 캔들의 위쪽 그림자가 짧으면 그날 시가가 고점에 가까웠음을 나타냅니다.. 상승일의 짧은 상단 그림자는 종가가 고점에 가까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시가, 고가, 저가, 종가의 관계에 따라 일간 촛대의 모습이 결정됩니다.

거래 촛불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촛대는 주식, 외환 및 선물과 같은 유동성 금융 자산을 거래하는 데 적합한 기술입니다. 긴 흰색/녹색 촛대는 강한 구매 압력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가격이 강세임을 나타냅니다..

데이 트레이딩 촛대 차트를 어떻게 읽습니까? 실제 몸체 바로 위와 아래에는 "그림자" 또는 "심지"가 있습니다. » 그림자는 그날 거래의 높은 가격과 낮은 가격을 보여줍니다. 하락 양초의 위쪽 그림자가 짧으면 그날 시가가 장중 고점에 가까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상승일의 짧은 상단 그림자는 종가가 고점에 가까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Coinbase에 라이브 차트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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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시티와 시티가구는 같은건가요?

레드 캔들 암호화폐란? 빨간 촛대 란 무엇입니까? 빨간 촛대는 유가 증권의 종가가 시가와 종가 모두 아래임을 나타내는 가격 차트. 종가가 이전 종가보다 낮지만 시가보다 높으면 촛대가 빨간색으로 표시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일반적으로 비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강세 하라미 양초 패턴이란 무엇입니까?

낙관적 인 하라미는 약세 추세에서 반전을 발견하는 데 사용되는 촛대 차트 표시기. 이는 일반적으로 지난 며칠 동안 주어진 주식의 하락 가격 움직임(검은색 양초로 표시) 내에 포함될 수 있는 가격의 작은 상승(흰색 양초로 표시)으로 표시됩니다.

초보자를 위한 촛대는 어떻게 읽나요?

촛대 패턴이 작동합니까?

촛대 패턴의 효과에 대해 수행된 연구는 전반적으로, 패턴은 50%의 시간 동안 성공합니다.. 따라서 거래자는 어떤 패턴이 수익성이 있고 결국 손실을 보게 될 패턴을 결정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Coinbase 수수료가 높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Coinbase는 고정 요금 또는 변동 요금에 대해 더 높은 금액을 청구합니다. 결제 수단에 따라. Coinbase Pro는 계층을 사용하며 더 많거나 더 높은 달러 거래가 더 낮은 비용으로 제공됩니다. 예: $10,000 미만의 거래는 0.50%의 테이커 수수료 또는 0.50%의 메이커 수수료를 지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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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인베이스가 로빈후드보다 나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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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는 교회란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절망스럽다. 이유는 간단하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참된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질문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절망감은 혼란스러움으로 진화한다. 교회의 모습에 대한 혼란스러움이다. 비정상적인 모습이 정상적인 것처럼 활개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더욱 성경으로 돌아가 성령이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교회의 본질에 대한 가장 적절한 답을 성경 안에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요한계시록 2-3장의 과거 역사에 실존해 있던 일곱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경청함으로써 그 해답을 찾아보는 것은 우리에게 신선한 통찰력을 촛대는 무엇입니까?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에베소 지역에 있는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 보자.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예수님

에베소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오른손에 일곱 별을 가지고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로 묘사되고 있다(1절). 계 1:20에 의하면 일곱 별이란 일곱 교회의 천사들(새번역)이고,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들이라고 해석된다.

예수님은 천상적 존재뿐만 아니라 지상의 일곱 교회들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우주적인 교회 공동체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지역 교회인 에베소교회를 주관하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교회의 주인이시다.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소유권을 대신할 존재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어떤 한 개인이나 집단이 교회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교회는 그 소유권이 예수님께 있으므로 한 개인의 뜻이나 계획이 관철되도록 하는 대상이 아닌 것이다. 소유권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 인식은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말씀하시는 예수님

그분이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형식을 취한다. 그것은 에베소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권위가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위 앞에 선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느꼈을 두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교회에 대한 소유권에 대한 배타성처럼 교회를 주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를 능가할 존재는 교회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담임목사도, 당회도 이 권위를 대신할 수 없다. 모두가 이 권위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서야 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권위를 대신하려고 한다거나 위임된 권위를 남용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예수님께 도전하는 격이 되고 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 말씀의 권위 앞에 엎드려야 할 존재에 예외가 있을 수 없다. 대부분의 경우에 이 말씀을 전하는 주체가 강단에서 목사이므로 목사 자신은 이 말씀을 들어야 하는 대상에서 예외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목사 자신도 예외일 수 없다. 목사도 그 말씀 앞에 엎드려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슬픈 것은 성도들이 목사에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정작 목사 자신은 온갖 병폐적 행위를 일삼으면서도 하나님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존재라는 점에 있어서는 매우 너그럽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목사들 자신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입장이 아닌지를 심각하게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 어떤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목사의 독단적 결정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될 수 있다. 예수님의 권위 앞에 동등한 입장에 서 촛대는 무엇입니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예수님께서 교회 공동체를 통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모습일 것이다.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칭찬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에베소교회 공동체의 모든 것을 아신다고 하신다(2절).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예수님께서 그 교회를 모른다고 할 수 없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은 분명 한국교회를 알고 계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알고 계신다고 할 때 한쪽은 환희와 기쁨,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으로 확연하게 갈리고 말 것이다. 한국교회는 어떠할까? 이 대목에서 다들 '나는 예수님께 기쁜 일을 했으니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할 것이다.

기준이 없어 보인다. 누구든지 자신은 예수님께 칭찬 받을 일 했다고 만천하에 외쳐 댈 수 있을 것이다. 누구는 초호화 초대형 예배당을 건축해 놓고 나는 예수님 앞에 자랑스러운 일을 했다고 감격해 할 것이다. 그래서 그 기준을 성경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아신다고 한 것은 무엇일까? 먼저 그것은 그들의 행위, 수고와 인내이다(2a). 이것은 3절에서 쉽게 풀어서 반복 언급되고 있다. 먼저 '인내'는 '너희가 인내를 가지고 있다'라는 문구로 반복되고. '수고'는 '나의 이름을 인하여 견디다'라는 말로 반복된다. 그리고 그들의 수고는 '피곤해 하지 않는다'는 말과 연결된다(우리말 번역에 '게으르지 않다'라는 번역은 '피곤해 하지 않다'라는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 촛대는 무엇입니까? 두 단어는 서로 동일한 어근을 가지고 있다. '수고'라는 단어에 해당되는 원어를 음역하면 '코포스'이고 '피곤하다'는 단어의 어근의 음역은 '코피아오'이다).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은 주님을 위해 수고했지만 피곤해하지 않았다. 끝으로 2절의 '행위'는 3절의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었다'라는 것과 연결된다. 그들의 행위는 주님의 이름을 위해 세상의 도전 앞에 끝까지 버티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행위, 수고 그리고 인내는 교회에서 하는 일들을 두고 하는 표현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예수님 앞에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초래되는 모습들에 대한 표현들이다.

2a와 3절의 이러한 의도적 연결의 중간에 2b에서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A(2a)-B(2b)-A'(3절)의 구조를 형성한다. 곧 에베소 성도들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의 핵심에는 바로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거짓된 것을 드러낸 그들의 행위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 가운데 그래도 평가할 만한 것들이 바로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않고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악한 자들'이란 도덕적으로 악한 자들이라기보다는 바로 이어져 나오는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을 가리키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은 다른 말로 '거짓 사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자들은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다(참조 고후 11:13-15). 그러므로 분별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들은 거짓된 교훈을 가지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이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바로 이러한 자들을 시험하여 밝혀냈을 뿐만 아니라 용납하지 않았다. 바로 그들의 수고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거짓된 가르침을 걸러내고 교회의 순수성을 지켜내는 것이다.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은 결코 쉽지 않은 그 일을 해냈고 예수님은 그들의 수고를 아시고 아낌없이 칭찬하신다.

우리 한국교회는 이처럼 에베소교회가 했던 일 가운데 교회의 순수성을 지켜 내기 위해 잘못된 가르침을 시험하여 분별해 내야 하는 것이 시급하다.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을 요즘 말로 바꾸어 말하면 자칭 목사라 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거짓된 가르침으로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다.

특별히 기독교 TV에 나와 설교하는 목회자들 중에 어떤 경우에 교회를 어지럽히는 가르침들이 난무한다. 이러한 현상의 결과는 당장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나타나도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해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예수님이 그 상태를 아시고 그 회복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책망하시는 예수님

다음 4-5절에서는 반전이 일어난다. 이러한 반전은 '그러나'라는 접속사에 의해 예고된다. 그 반전은 칭찬으로부터 책망으로의 반전이다. 책망의 내용은 이러하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그들이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이다(4절). 이러한 단어의 사용에 의해 처음 사랑을 무의식 중에 상실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유기라고 보인다.

그렇다면 처음 사랑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독자들은 쉽게 그 처음 사랑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고 단정할 가능성이 많다. 과연 그러한가? 그렇다고 보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상실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본문(2-3절)에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계신다. 그들은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의 거짓된 가르침을 분별해 낸 자들이다. 이것만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살아 있는 모습이 또 있겠는가? 이들이 하나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처음 사랑이란 무엇이겠는가?

이것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 말고 상실했을 가능성이 있는 '처음 사랑'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여기에서 말하는 처음 사랑이란 성도들 사이에 존재했던 사랑을 가리킬 가능성이 많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올바른 교훈을 세우기 위해 거짓 교훈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사랑 없이 바른 것만을 주장한다면 얼마든지 사랑이 없는 공동체로 전락할 수 있다.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형제자매들 간의 사랑을 상실한 에베소교회 공동체의 실상은 예수님께 책망을 받는 처지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 사랑을 그렇게 규정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의미를 철저하게 배제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매우 유기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하나가 없이 다른 하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힘들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말하는 것을 주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교회 안에서 처음 사랑을 찾아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더 문제는 그러한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 바른 교훈을 찾는 과정에서 일어난 결과가 아니라는 것에 있다.

한국교회는 차라리 바른 것을 추구하다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예수님의 이러한 책망을 받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한국교회에 과연 바른 신학이 있기라도 한 것인가?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사랑을 버린 것은 그러한 이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어디에서 떨어졌는가를 기억하고 회개하고 처음 행위들을 행할 것을 촉구하신다(5a). 당연하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문제를 그냥 넘어 갈 수 없지 않은가?

여기에서 세 개의 중요한 동사가 주목된다: 기억하라; 회개하라; 행하라. 회개의 행위는 분명하게 어디에서 문제가 발생했는가를 보여주는 과거를 기억하는데서 출발한다. 과거를 기억할 때 회개의 출구를 발견한다. 그리고 처음의 행위들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상상 속에서 촛대는 무엇입니까? 회개는 없다. 행동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회개의 열매가 열린다.

그런데 이 문제는 예수님께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지나 보다. 예수님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면(이 '회개하지 아니하면'이라는 문구는 두 번 반복되어 강조된다) '촛대를 옮겨 버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5b). 촛대를 옮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촛대는 교회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촛대를 옮긴다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을 소멸시켜 버리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교회로서의 본질을 상실케 하시겠다는 경고이다. 사랑이 없는 교회 공동체는 교회로서의 본질을 갖고 있을 수 없다. 사랑 없는 교회 공동체는 그 자체가 심판일 수 있다.

이러한 예수님의 경고에 대해 한국교회는 자유로운가? 한국교회에 처음 사랑은 버리지는 않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교회는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수 있는 위험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처음 사랑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처음 사랑을 버리게 된 것은 에베소교회와는 좀 다른 이유 때문이다. 그것은 바른 교훈을 세우려고 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 아닌 것이 더욱 안타깝다. 차라리 그러했으면 바른 교훈이라도 얻어 위로라도 삼을 수 있을 터인데. 어느새 우리 한국교회에는 교회의 대형화가 큰 경향으로 자리 잡아 버렸다. 그래서 작은 교회들도 대형 교회가 되고자 하는 경쟁 대열에 합류한다.

거의 모든 교회의 시스템이 성도들의 성경적 삶의 증진보다는 교회의 부흥을 위해 존재한다. 대형 교회들은 그들대로 서로 경쟁심을 갖는다. 그래서 더 크고 더 화려한 예배당을 지으려고 한다. 이러한 크고 화려한 예배당 속에서 군중들은 고독해 한다. 역으로 대형 교회는 간섭 받기 싫은 사람들의 천국이다. 사람의 관심이 못 미치니 편안하게 교회를 다닐 수 있다. 그래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예수님의 도전은 이래저래 오늘날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요청이다. 그래서 교회의 대형화는 처음 사랑을 버리게 된 상황을 초래한 중요한 이유이면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칭찬하시는 예수님

6절은 또 다른 반전이 일어난다. 이 반전 또한 4절의 경우처럼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시작된다. 이 반전의 내용은 책망에서 다시 칭찬으로 돌아선다. 그래서 칭찬-책망-칭찬의 구조를 이룬다. 칭찬의 내용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했다는 것이다. 이 니골라당은 2:14-15에 의하면 발람의 교훈과 관련된다. 그리고 이 발람의 교훈은 2:20-23에 의하면 이세벨과 관련된다. 곧 니골라당의 가르침은 발람과 이세벨과 같은 인물들이 자행했던 우상숭배와 음행과 관련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에베소교회가 위치한 에베소라는 도시는 황제 숭배를 비롯한 각종 우상숭배가 성행되었던 곳이었다. 이를 감안한다면 니골라당이란 에베소교회 안에 이러한 가르침을 교묘하게 도입하려 했던 자들이었을 것이다. 특별히 이들이 2:2-3의 거짓 사도와 관련된다면 그들은 우상숭배와 같은 이교적 행위를 적당하게 기독교적 진리와 혼합하려는 시도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이것을 미워하신다고 하시면서 이러한 자들의 교훈을 미워한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칭찬하신다.

에베소교회 공동체도 찬란한 이교 문화의 영향하에 있었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문화적 업적은 오늘날도 널리 인정되고 그 영향은 모든 인간의 생활과 사고방식에 깊숙이 파급되어 있다. 그런데 그러한 문화적 결과물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더럽히려 할 때, 혹은 그리스도의 권세를 침범할 때 그들은 과감하게 그것을 미워한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 점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한국교회 안에 기독교 진리와 세속적 물결이 문화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혼합되어 잠입해 있다. 우리 한국교회는 세상은 무조건 악한 것이고 교회 안은 무조건 선한 것이라는 이교적 이원론에 사로 잡혀 있어 이러한 세속적 문화를 분별할 능력이 취약하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세속적 문화를 접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것을 등지고 살 때 결과는 둘 중의 하나이다. 완전 고립된 삶을 살게 되든지, 아니면 세속적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므로 그것에 저항할 방법에 대한 무지로 말미암아 완전히 물들게 되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어쩌면 우리 한국교회는 이 양 극단의 경우를 모두 경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문제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내세워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러한 세속적 문화를 활용하는 데 취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분별하는 시금석이 되는 것이다. 그러할 때 니골라당의 교훈 같은 교묘한 경우들을 분별해 내어 내칠 수 있는 내성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상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그것은 지상의 모든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귀가 있는 자들이라면 누구든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누구든지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사도들도, 목사들도, 장도들도, 신학교 교수들도 예외 없이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기는 자에게는…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로부터 과실을 먹게 하실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직접 약속하신다(7절). 여기에서 '이기는 자'라는 문구는 왜 등장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요청하고 있는 것들이 바로 치열한 투쟁 가운데서 얻어지고 지켜질 수 있다는 의식 때문이다.

그냥 적당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이기느냐 패배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에 순종하여 회개하고 처음 사랑을 회복하면 이기는 자가 되고 그렇지 않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패배하는 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전투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물론 다른 성경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존재한다). 이러한 요한계시록 말씀의 경향을 따라 한국교회가 직면한 이 현실을 영적 전투의 현장으로 선포해 보자.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생명나무를 먹게 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 열매가 가지는 의미로 '생명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의 지속적인 체험을 허락하시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영원한 구원으로 말미암은 충만한 생명에의 동참에 대한 표현과 다름 아니다. 이러한 약속은 22:2-4에서 미래적 종말의 시점에 주어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결국 요한계시록 내에서 이러한 약속과 성취의 관계를 긴밀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심을 강변해주고 있다.

우리 한국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러한 영원한 촛대는 무엇입니까? 구원의 소망을 바라보며 매일 매일 삶의 현장에서 주어지는 도전 앞에 굴하지 않고 패배하지 않고 이기는 자로서 살아가는 삶이 주어졌으면 참 좋겠다.

이필찬 /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성경적종말론연구소 소장

이필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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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대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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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Tasha님. 요청하신 대로, 월간새벽기도 6월호부터 변경된 주소로 발송하겠습니다. 앞으로는 변경사항 있으시면 매월 15일까지 알려주세요. 감사합니다~^^
  • 은혜의 말씀에 힘을 얻고 갑니다
  • 은혜 받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어제 만나뵙게되어 너무도 큰 영광이었습니다 오늘도 본부장님과 통화를 하는데 왜 그리 어제의 오찬장면이 떠오르는지.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눈물이 많은건 알지만 자양동에서 오는 내내 그치질 않더군요. 지금도 그 은혜로운 자리의 여운이 가시질 않습니다.정말 맛있는
  • 야고보서파일대금 입금했습니다. 보내주실메알: [email protected]
  • 안녕하세요 inhm09 님. 저희가 월욜에 출근해서 확인 후 발송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신앙생활에 필수적인 4대 삶 (요한계시록 1장 17-20절)
작성자 미션퍼블릭 등록일 2014-04-01

(17절)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촛대는 무엇입니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18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절)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절)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1. 제물이 되는 삶

예수님의 환상을 보고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17절). 이 모습은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모습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잘해야 할 것은 ‘주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는 것, 즉 하나님 앞에 온전한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제물이 살아있으면 더 싱싱하고 좋을 것 같지만 제물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제물이 제단 위에서 활개를 친다면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교회를 ‘하나님의 제단’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제단은 있는데 제물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제물이 있어도 산 제물은 있지만 죽은 제물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제단 위에 놓인 제물이 살아있으면 하나님은 그 제사를 죽은 제사로 보시고 하나님의 제단 위에 놓인 제물이 죽어 있으면 하나님은 그 제사를 산 제사로 보십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공하는 일’이나 ‘체험하는 일’이 아니라 ‘제물이 되는 일’입니다.

2. 두려움이 없는 삶

예수님의 환상을 보고 엎드러진 사도 요한에게 예수님이 오른손으로 안수하시고 위로의 말씀을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17절).” 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까? 주님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기 때문입니다(18절). 두려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나 행음하는 것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것 이상의 죄입니다(계 21:8). 왜 두려워하는 것이 큰 죄입니까? 두려움은 주님을 작게 보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대개 보면 눈이 큰 사람이 두려움도 많습니다. 영적인 의미에서도 ‘눈이 큰 사람’이 두려움이 많습니다. 즉 뵈는 것이 많으면 두려움도 많아집니다. 뵈는 게 없고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신 주님만 보여야 담대해집니다. 사는 것에 지나치게 관심을 두면 제대로 살지도 못하고 두려움에 젖어 살게 되지만 주님을 믿고 죽기를 각오하면 그 가운데 사는 길이 열립니다. 지나치게 살려고 하니까 시험거리가 많은 것이지 죽기를 각오하면 더 이상 죽어야 할 일이나 시험받을 일이 없게 되고 그때 오히려 주님의 지극한 위로와 평강이 넘치게 됩니다.

3. 증거자의 삶

사도 요한에게 위로의 음성을 들려 준 후 주님은 다시 한 번 사도 요한에게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기록하라고 했을까요? 남에게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처럼 자신이 경험한 진리나 체험이나 환상이나 은혜를 항상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수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것들을 나눔과 증거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 나눔과 증거가 없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사도 요한이 본 환상, 즉 요한계시록은 종교적 엑스터시를 추구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 엑스터시를 추구하면 시한부 종말론이 나오고 종말 열병에 빠집니다. 종교적 엑스터시는 가장 영적인 모양을 하지만 가장 영적으로 해로운 것입니다. 종교적 엑스터시는 마약이 주는 엑스터시와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자신이 가진 물질, 재능, 인맥, 지위, 시간 등 모든 것을 활용해 복음 전파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가장 종말론에 관한 말씀을 잘 이해하고 종말을 잘 대비하는 복된 사람입니다.

4. 교회를 사랑하는 삶

요한계시록의 초점은 교회에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교회와 교회의 일꾼들을 붙드시고 보호하실 것입니다(20절). 옛날에는 가난했지만 얼마나 순수하게 교회를 사랑했습니까? 그때는 교회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대단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한국 교회에 은혜를 주셨습니다. 오늘날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옛날에 비하면 상당히 잘 살게 되었지만 그때보다 계산이 없는 헌신적인 교회 사랑이 크게 약해진 것입니다.

이 민족을 치료하는 길과 우리 영혼을 치료하고 축복 받는 길은 다시 교회 사랑을 다짐하고 실천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른 모든 문제도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오른손에 붙잡힌 교회의 충성스런 일꾼이 되고 자신을 통해 마지막 때에 주님이 크게 증거되고 영광 받는 꿈과 비전을 가지십시오. 성도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바램이 요한계시록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영적으로 어둡고 어려운 터널을 지나고 있습니다. 교회 성장이 많이 힘들어졌습니다. 많은 개척교회들이 문을 닫고 있습니다. 교회의 이미지가 나빠져 전도의 길도 많이 막혔고 심지어는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영적인 큰 가뭄의 시대에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그런 인물의 꿈을 가지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교회를 섬기고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세상에서도 열심히 사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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